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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생(2014)을 보았다


2014년 11월에 쓴 글입니다

영화 미생 포스터 - 나무위키
영화 미생 포스터 - 나무위키

내가 아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지 않는다. 구멍난 이마트 양말을 신는다. 위장약을 먹는 사람도 있고 집에 아들 딸이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걸쳤건 어떻게 생긴 사람이건 하등 상관없다. 우리나라 직장에서는 어디서나 악마를 찾을 수 있다. 되풀이되는 폭력의 고리 때문이다. 미생은 한국의 사내정치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의 관료제를 비꼬았던 근현대소설보다는 더 어둡다. 김승옥의 작품에 등장하는 회사원들은 회사 바깥의 삶을 살 여유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반면 미생의 주인공은 발버둥쳐봐야 계약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직장 외의 시간은 야근과 회식으로 대부분 생략된다. 주인공의 학창시절 친구는 불명이고 유일한 러브라인도 있는둥 마는둥 그려진다.

대신 회사 안을 그려낼 때의 디테일이 회사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소스라칠 정도다. PPT나 골프같은 키워드도 그렇지만 구력과 나이를 내세운 직장 특유의 언어폭력이 정말 가관이다. 실제 직장의 악마들이 내뱉는 말들은 프라다를 입은 노배우가 영화에서 내뱉었던 말보다 비현실적이다. 내가 만만하냐 개새끼야라는 말을 하는 메릴 스트립을 상상할 수 있는가. 직장생활을 비교적 현실적으로 그려낸 만화인 미생은 어느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경험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몇몇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회사의 크고 작음 좋고 나쁨과는 상관 없이 직장에는 항상 악마들이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였다. 안정적인 급여와 노후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로와 군대에 바탕을 둔 업무문화가 악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본질은 악마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순수한 열망이 있었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가족이 있었으며 올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때로는 뛰어난 특기도 하나쯤 가지고 있는 훌륭한 어른들이었다. 만화를 읽으면서 그 사람들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불안한 미래때문에 부득이 내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던 그 어른들이 프라다라도 입고 있었다면 차라리 덜 안타까웠을텐데. 꼭 그래야만 했던건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