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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1

영화 조조래빗(2020)을 보았다


2020년 5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 조조래빗 스틸컷 - IMDB영화 조조래빗 스틸컷 - IMDB

삐뚤빼뚤한 글씨가 처연하다. ㄱ도 어설프고 ㄴ도 어딘가 각이 안 맞는다. 모음들은 어딘가 중심 없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힘을 담아 꾹꾹 눌러쓰긴 했다. 잠깐 그럴듯해도 어설픔이 비죽 튀어나온다. 억지로 떠밀려 쓴 일기장을 오랜만에 들춰보니 괜히 얼굴이 부끄러워진다. 글씨체만 갈피를 못 잡는 게 아니다. 표지에 쓰인 "바른생활"이 무색하게 인생에 방향이 딱히 없었다. 어딘가로 튀어나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남들은 뭐가 됐건 왜 안된다는 말만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귀찮은데 일기는 왜 쓰라고 하는건지. 누군가 상냥하게 알려준 꽃길은 죽어도 걷기 싫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다. 멋지기보단 좀 처량하지 싶다. 버티다가 일그러진 받침들처럼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에 사는 꼬맹이 '조조'의 마음속에도 독재자가 산다. 영화 조조 래빗 이야기다. 독재자의 모습은 히틀러를 닮았다. 말하는 것도 히틀러처럼 말하며 행동하는 것도 당시 독일의 최고 독재자 그 자체다. 하지만 본체는 제 앞가림도 못한다. 등장부터 히틀러 청소년단에서 수류탄 사고를 저지르고, 영화 내내 모두에게서 동정의 눈길을 받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는 누구도 막지 못할 독재자다. 조조는 나치다운 나치가 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럴만한 자질이 있느냐는 상관없다. 마음속에 적을 두고 죽일 듯이 미워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너는 언젠가 위대한 나치가 될 것이다. 히틀러를 닮은 마음속의 독재자가 속삭인다.

히틀러 역할을 맡은 타이카 와이키키는 뉴질랜드의 유명한 코미디 5인조 So You're a Man출신이다.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2014) 에서는 죽지 못해 사는 뱀파이어의 숙명에도 혼자 장난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조조 래빗에서도 패전의 기운이 서린 가운데 혼자 천진하다. 아니 그보다 뉴질랜드 출신이면서도 전 세계에서 웃긴 걸로 유명한 5인조 중 한 명이니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전시를 살아가는 모든 등장인물 중에 제일 현실감각이 없고 이질적이다. 마치 이건 대놓고 실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치즘이 더는 없어 다행이다. 나는 제일 엉뚱한 삐딱선만 골라타는 재주가 있다. 면접관에게 머리숙일 필요도 없고, 답답한 공채시험도 안봐도 된다면 그게 나치즘 비슷한 괴악한 것이라도 올라탔을지 모른다. 나는 남들이 다 가는 길만 피해 가면 내가 가는 길이 조금은 더 돋보일 거라고 믿는 괴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황만 수년 째 하다 보니 지금까지 병신짓만 해왔다는 건 나 같은 허접한 인생도 알 수 있다. 인생엔 잘못된 길도 적수도 없다. 마음속 독재자가 뉴질랜드 마오리족 피부를 한 허구의 존재였던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불안해서 급하게 문구점에서 사온 펜으로 정자체를 따라 써본다. 여전히 못났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덜 못나 보이는 것 같다. 친구에게 어제 또 술을 마시다 기억을 잃었다고 징징대지만 않아도 대성공이다. 그렇게 조금씩 고쳐가는 중이다. 글씨건 인생이건.